클라이언트가 가장 많이 하는 요구가 있습니다. "요즘 느낌으로 트렌디하게 해주세요."
문제는 이 말이 사람마다 전부 다른 뜻이라는 겁니다. 대표가 생각하는 트렌디함과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트렌디함이 다르면, 시안은 몇 번을 다시 그려도 통과되지 않습니다.
이 모호한 한 문장을 근거 있는 디자인 방향으로 바꾸는 기술이 트렌드 리서치입니다. 이 글에서는 자료 수집부터 키워드 도출, 기회 영역 매트릭스, 혁신 테마 작성까지 트렌드 리서치의 전 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합니다.
트렌드란 무엇인가 - 유행과의 차이부터
트렌드는 사회와 특정 문화, 시장이 변화하는 현상과 경향입니다. 여기서 초보자가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트렌드와 유행의 차이입니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지속 기간이 다릅니다.
유행(fad)은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유지되고, 트렌드는 5~10년간 지속됩니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할까요. 지금 인스타그램에서 도는 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만들면, 그 결과물이 세상에 나올 즈음엔 이미 유행이 지나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 트렌드는 유지 기간이 길기 때문에, 트렌드를 근거로 방향을 잡으면 결과물이 출시된 뒤에도 유효합니다. 브랜드 리뉴얼처럼 몇 년을 갈 결과물일수록 유행이 아니라 트렌드를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가지 더. 트렌드는 변화의 주기가 유동적이어서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트렌드 조사는 한 번에 끝내는 이벤트가 아니라, 관련 기사와 동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하는 습관에 가깝습니다. 프로젝트가 없을 때도 자료를 모아두는 디자이너와 프로젝트가 떨어져야 검색을 시작하는 디자이너의 리서치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트렌드 리서치가 하는 일
트렌드 리서치는 사회, 경제, 기술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트렌드의 변화 요인을 파악하고,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들을 총체적 흐름과 상세한 적용 요인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조사입니다.
말이 어렵죠. 실무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디자인 리서치가 "지금 사용자가 어떤 배경에 있는가"를 보는 조사라면, 트렌드 리서치는 **"그 배경이 지금 어느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가"**를 보는 조사입니다. 현재가 아니라 변화를 봅니다.
그리고 이 조사의 최종 목적은 자료를 모으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트렌드는 디자인 전략 도출의 근거가 됩니다. 프로젝트 구성원들이 콘셉트 방향을 정할 때 키워드를 추출하는 원천 자료가 되는 것이죠. 리서치의 성패는 "얼마나 많이 모았나"가 아니라 "모은 것에서 방향이 나오는가"로 갈립니다.
1단계. 트렌드 자료 수집
수집에서 지켜야 할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경로를 병행할 것, 범위를 한정하지 말 것, 출처를 남길 것.
기관 자료 - 검증된 동향
트렌드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관련 연구 기관들이 해마다 트렌드 연구 보고서를 발행합니다. 대표적인 곳들입니다.
- KIDP designDB —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운영하는 디자인 동향·트렌드 정보
- 한국트렌드연구소 — 소비·라이프스타일 트렌드
- 메타트렌드 — 디자인·기술 트렌드 리포트
- 닐슨 — 글로벌 소비자 조사 데이터
기관 자료의 장점은 검증입니다. 전문 연구진이 데이터를 근거로 정리한 자료라 "제 느낌이 아니라 이 보고서에 따르면"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미지 채널 - 시각적 최신 동향
시각디자인은 다양한 분야의 스타일을 비주얼하게 변형하고 활용하기 때문에, 스타일에 대한 리서치가 특히 중요합니다. 색상, 형태, 질감, 분위기 — 이런 시각 요소의 트렌드는 텍스트 보고서보다 이미지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 핀터레스트(Pinterest) — 키워드 검색으로 최신 디자인 동향 파악에 가장 유용
- 인스타그램, 플리커 등 이미지 기반 SNS
- 최신 패션·디자인·트렌드 잡지 (인터넷에서 검색되지 않는 자료가 많아 도서관·이북 활용 가치가 큼)
주의할 점 하나. 스타일 자료는 트렌드 발표 기관의 자료만 찾는 게 아니라 디자인, 광고, 패션, 건축, 예술 등 다양한 시각 관련 분야를 함께 찾아야 합니다. F&B 브랜딩 프로젝트라고 F&B만 보면 남들과 똑같은 레퍼런스에 도달합니다. 패션의 색, 건축의 질감에서 가져온 단서가 차별화를 만듭니다.
출처 표기 - 협상 불가 원칙
수집한 모든 이미지와 자료에는 출처를 반드시 기입합니다. 컴퓨터 화면의 이미지는 스크린 캡처하고, 인쇄물은 카메라로 촬영하되, 어디서 가져왔는지를 항상 함께 기록하세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리서치는 근거를 만드는 작업인데 출처 없는 자료는 근거 능력이 없습니다. "이 이미지 어디서 났어요?"에 답하지 못하면 그 자료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저작권입니다. 블로그 자료 중 언론 기사나 연구 기관 자료를 발췌한 경우에는 발췌한 자료의 원본을 찾아 그 출처를 명시해야 합니다.
정리 도구는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이 편합니다
자료 관리는 파워포인트 등의 프레젠테이션 프로그램으로 기록하는 것이 수월합니다. 내용의 흐름대로 기록할 수 있고, 이미지·텍스트·링크 등 여러 형태의 파일을 하나로 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집 시작 단계부터 일정한 양식(프로젝트명, 자료 출처, 관련 이미지)을 만들어 쌓으세요.
2단계. 키워드 도출 - 그룹핑으로 공통점 찾기
자료가 모였으면 이제 압축합니다. 키워드 도출은 수집된 트렌드 이미지를 전체로 나열하여 공통점을 찾아내고, 트렌드의 특징을 단어로 정리하는 과정입니다.
방법은 물리적입니다. 수집한 이미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펼칩니다. 자료가 많다면 프린트해서 보드나 벽에 붙이는 것도 좋습니다. 모든 자료를 하나의 장표에 배치하면 데이터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훨씬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서 비슷한 것끼리 묶습니다. 색감이 비슷한 것, 형태 언어가 비슷한 것, 분위기가 비슷한 것. 묶음이 만들어지면 각 묶음에 이름을 붙입니다. 그 이름이 트렌드 키워드입니다.
여기서 평가와 실무 양쪽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나옵니다. 키워드는 추적 가능해야 합니다. "이 키워드 어디서 나왔어요?"라고 물었을 때 "이 이미지 12장의 공통점입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료 따로, 키워드 따로 — 멋있는 단어를 먼저 정해놓고 이미지를 나중에 끼워 맞추면 그룹핑 과정이 추적되지 않고, 리서치가 아니라 취향 발표가 됩니다.
키워드가 잘 안 나올 때의 팁도 있습니다. 뉴스나 기사 검색 과정에서 제시되는 사회 트렌드를 반영하면 조금 더 쉽게 도출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묶음에서 본 현상이 기사에서 이미 이름 붙여져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3단계. 기회 영역 매트릭스 - 시장을 두 축으로 다시 보기
키워드까지 나왔으면 이제 분석입니다. 트렌드의 전략화는 시장 환경 트렌드와 스타일 트렌드 분석 결과를 통합하여 향후 디자인 개발의 전략 방향을 수립하는 단계입니다. 그 핵심 도구가 기회 영역 매트릭스입니다.
축 만들기 - 대비되는 공통 속성 2개
도출한 키워드들을 포괄할 수 있는 공통 속성을 뽑습니다. 그리고 그중 두 개를 X축과 Y축으로 삼습니다.
축을 만들 때 반드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도출된 공통 속성이 서로 겹치지 않고 완전히 대비되는 속성인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도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 현대적인'은 대비가 성립하지만, '따뜻한 ↔ 클래식한'은 축이 되지 못합니다. 따뜻하면서 클래식할 수 있으니까요. 한 축의 양 끝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관계여야 합니다.
매핑 - 주관을 배제하는 방법
축이 만들어지면 4사분면 위에 경쟁 브랜드와 유사 사례들을 배치합니다. 시각 자료는 주로 브랜드 로고타입, 제품 사진 등의 이미지를 준비해서 놓습니다.
여기서 이 단계 최대의 함정이 나옵니다. "내 느낌상 여기쯤"으로 배치하는 것. 매트릭스에서 선택한 시장에 대한 분석 내용은 시장 조사 자료에서 찾을 수 있으므로, 조사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배제해야 합니다. 각 브랜드를 어디에 놓을지는 그 브랜드에 대해 수집한 자료(비주얼, 가격대, 타깃, 커뮤니케이션 톤)가 결정합니다. 위치 배치와 재배치를 반복하면서, 배치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 설문 조사를 병행해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기회 영역 읽기
매핑이 끝나면 맵에 비어 있는 자리가 보입니다. 경쟁자들이 몰려 있는 사분면과 아무도 없는 사분면. 그 빈자리가 전부 기회는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이유가 "아직 아무도 못 봐서"인지 "가봤자 수요가 없어서"인지를 트렌드 자료로 판별해야 합니다. 트렌드가 그 방향으로 이동 중이라는 근거가 있는 빈자리 — 그곳이 기회 영역이고, 우리 브랜드가 점유할 포지션입니다.
4단계. 혁신 테마 - 명령문 한 문장으로
기회 영역을 정했으면 그 자리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문장으로 만듭니다. 이것을 혁신 테마라고 부릅니다.
혁신 테마 작성 규칙은 명확합니다.
- 명령문 형태로 기술합니다. "따뜻함을 유지하며 젊어진다" 같은 서술이 아니라, "오프라인 단골의 신뢰 요소를 유지한 채, 온라인 첫 방문자가 3초 안에 '요즘 브랜드'로 인식하게 하라"처럼 실행을 지시하는 문장으로 씁니다.
- 근거 세 가지를 붙입니다. 관련 트렌드(Trends), 핵심적인 니즈(Meta Needs), 시사점. 테마가 어느 분석에서 나왔는지를 근거 자료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 도출된 인사이트가 여러 개라면 그룹핑하고 우선순위를 고려하여 테마를 선정합니다.
명령문으로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혁신 테마는 이후 시안 디자인 단계에서 콘셉트를 선별하는 기준으로 쓰입니다. 시안 A와 B 중 무엇을 밀지 고민될 때, 테마 문장에 더 부합하는 쪽을 고르는 식이죠. 그래서 테마는 최대한 구체적이어야 하고, 애매한 형용사 나열이면 기준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5단계. 충돌하는 요구 다루기 - 리서치의 진짜 쓸모
이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트렌디하게, 그런데 우리다움은 잃지 않게." 이 요구의 두 단어는 그냥 두면 충돌합니다. 트렌드를 따르면 남들과 비슷해지고, 우리다움을 지키면 낡아 보이니까요.
리서치가 이 충돌을 푸는 방식은 분해입니다. 뭉뚱그려진 '트렌디함'을 키워드 3개로 분해했고, '우리다움'도 브랜드 조사로 구성 요소(예: 단골이 신뢰하는 요소, 10년의 헤리티지)로 분해할 수 있습니다. 분해하고 나면 보입니다 — 충돌하는 건 전체가 아니라 일부 요소이고, 어떤 트렌드 키워드는 오히려 우리다움과 결이 같다는 것이.
그래서 양립안은 이런 구조가 됩니다. "트렌드 키워드 A와 B는 수용하되, 우리다움의 핵심 요소인 ○○과 충돌하는 C는 채택하지 않는다. 근거는 기회 영역 매트릭스에서 A·B 방향의 빈자리와, 타깃 소비자 조사의 ○○ 신뢰 데이터다." 느낌의 충돌이 자료의 취사선택 문제로 바뀌는 순간, 대표를 설득할 수 있는 보고가 됩니다.
발표에서 반드시 나오는 질문들
트렌드 리서치 보고(그리고 평가의 구두발표)에서 물어보는 질문은 사실 정해져 있습니다. 전부 한 가지를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 근거가 이어져 있는가.
- "이 축을 선택한 근거 자료는 무엇인가요?" → 키워드 → 공통 속성 도출 과정이 추적되는지
- "매핑할 때 본인 주관을 어떻게 배제했나요?" → 배치의 기준이 조사 자료인지 느낌인지
- "이 테마가 시안 단계에서 어떻게 쓰이나요?" → 리서치가 장식인지 기준인지
거꾸로 말하면, 작업하는 동안 이 세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면서 진행하면 발표는 저절로 준비됩니다. 보고서의 어떤 문장을 짚어도 "이 자료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는 상태 — 그게 트렌드 리서치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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